포베다 천산의 하늘에서...

2003.02.07 02:28

박성민 조회 수:2050 추천:17

이제는 천천히 지난 여름의 이야기를 풀어 보려고 합니다.

천산의 하늘에서

예전 아주 오래 전에 재학생시절 산악회 선배님들의 요세미테 원정 계획을 듣고 원정의 대상 연도가 내가 군대에 갈 때쯤이라 속내는 무척 아주 많이 섭섭했었다. 나도 산에 들면서 꿈을 꿔왔던 원정이었기 때문이다...

2학년이 되어서 후배들을 가르치며 동기인 윤성이와 우리는 군에서 제대하면  선배님들이 요세미테에 가는 대신 알프스3대 북벽을 하자고 약속을 하고 서로들 군에 몸을 담다가 제대를 하였으나 선배님들의 원정은 무산되고 사회 초년생의 고달픔은 언제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느냐는 듯이 잊어 버리게 됬다.
윤성이가 어느날 알프스 언제 갈래라고 물었을 때 대답을 못한게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어 지금도 언젠가는 윤성이와 알프스를 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우리가 늙어서 아주 힘이 없기 전 까지는....

5년전 처음 산악회 회장이 됬을 때 총회에서 처음 꺼낸 얘기가 산악회원정이었고 20주년이라는 기념 산행도 겸하게 되면서 그동안 레닌으로 매킨리로 그리고 설악의 온골을 해 집고 다니며 포베다 원정을 준비하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원정을 가기 위한 대원은 세웅이와 정희 그리고 나 이 세명 이외에 특별한 지원자가 없었고 올해 들어서면서 행정을 맡은 정희가 착실히 준비를 하면서 원정은 가시화되었다.

산제 때 개념보고를 하고 매번 집회 때마다 진행상황을 보고하고 4월에 국제캠프와 일차적으로 계약을 한 후에 6월이 되서야 군대를 제대하는 건수가 참여 의사를 밝히면서 바야흐로 원정대의 규모가 구성되기 시작했다.

지난번 매킨리 원정때는 행정과 등반을 국현형이 해주시고 나는 나머지 일들을 준비하였으나 이번에는 정희와 세웅이가 준비를 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내가 편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게 됬다.

출국을 두 주일 앞두고 갑자기 결정된 종섭형의 참여로 인원구성도 어느 정도 익스퍼디션 다운 팀으로 구성되었으나 우리 맘처럼 편한 출발을 한 건 아니었다.

일단 나중에 참가한 두 대원의 비자문제가 걸려 출국일자를 7월16일에서 19일로 옮겨야 했으며 7월 집회에서는 두 대원이 후발대로 출발하는 문제까지 거론되었으나 19일로 비자 작업을 우여곡절 끝에 완료되어 전원이 19일에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모두들 7월16일까지 각자 회사로 출근을 하고 17일부터 합숙을 하며 최종 점검 및 부식,그리고 잔여 장비 대여와 구입을 하게 되었다. 매킨리 출발 때와 마찬 가지로 종섭형네 집에서 합숙을 하며 원정대의 짐 패킹과 나머지 잔일을 하게 되었다.

출국일에는 국현형을 비롯하여 중원형 등이 차량을 지원해 주셔서 인천공항으로 이동하였는데 대행사인 국제캠프에서 출발30분전에서야와서 여권을 가지고 오는 바람에 거의 뛰어 들어 가다시피 비행기를 탈 수가 있었다..

비행기는 6시간 정도 후에  거대한 산맥위로 날 게 되었는게 아마 그곳이 천산 산군 이었나 싶다. 멀리서 알마타가 보이고 사각형의 가로세로가 바둑판 모양으로 도로가 나있는 알마타 상공을 선회 하더니 우리나라의 속초공항 만한 알마타 국제공항에 내리게 됐다.

외국 여행을 하다보면 어느나라던지 그나라의 특유한 냄새가 난다. 마찬 가지로 알마타에도 어느곳하고 다른 특유한 향기로 나를 반기고 있었다.
알마타는 서울과 비슷하게 도시 뒤편에 산이 있었는데 이산이 적어도 해발 4천 이상은 되 보였다.(이름을 잊어 버림)

알마타는 현재 카자흐스탄의 수도는 아니지만 러시아에서 1800년대 후반에 전략적 요새로 건설 되기 시작 하여 1929년 카작 스탄의 수도로 되었다. 카작스탄은 1992년 구 소련이 헤체 되면서 카자흐스탄 공화국이 되었다.
카자흐스탄의 인종분포는 카작인 53.4%, 러시아인 30%, 우크라인 3.7%, 우주벡 2.5%, 타타르 1.7%, 위고르 1.4%, 벨라러시아 0.7%, 고려인 0.7% 정도 되는데 알마타에는 고려인인 1만2천명 정도 살고 있다고 한다.

어떻게 우리나라에서도 비행기로 7시간이나 떨어져 있는 이 먼 카자흐스탄에 한국인들이 살고 있는지...?
나중에도 고려인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곳의 우리민족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알아 둘만 하다.
우리 선조들이 조세포탈과 기흉등을 피해 1800년대말부터 소위 북간도로 불리 우는 만주땅으로 이주해서 만주를 개척 하기 시작 했고 향후에는 만주가 독립 운동의 중심이 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중  블라디보스톡과 연해주 근경을 점령 하게된 소련은 1937년 스탈린의 정권하에서 이루어진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수십만명의 한인들이 중앙 아시아로 이주 하였다.
이주 이유는  스탈린은 그때 당시 일본과의 싸움에서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이용하여 첩자로 사용하는 것에 대한 염려와 한인수의 증가에 따른 자치요구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소수민족 분산지배 정책과 벼농사 기술을 중앙 아시아의 농업개척에 이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사실적으로 소련은 많은 독립군들을 일본인 첩자로 몰아서 숙청을 하였다. (이것은 요새 야인 시대에 김두한의 아버지인 김좌진 장군도 이 경우와 비슷하게 살해 당했다.)
이주는 1937년 9-12월에 이루어 졌다. 이들은 화물차와 가축 운반철도로 이송 되었고, 10월과 12월 추운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하였다.

이들은 화물칸에 짐승처럼 실려왔고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런 이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얼어서 죽었다. 이것을 항의 하는 사람들은 모두 숙청을 당하였다.
고려인들은 인가가 없는 황량한 곳인 우슈토베란 곳에 내려졌다.
소련은 아무런 대책없이 추운 한 겨울에 이곳에 내려 놓은 것이다. 신정착지역에서 고려인들은 벼농사에 성공하여 3년만에 경제적 기반을 이룩할수 있었으며, 중앙 아시아외에 소련 전지역에 걸쳐 쌀을 공급하였다. 그 이전에는 소련 지역에서는 쌀을 재배 할 수가 없었다.

한민족의 끊질긴 생명력이 이 먼 이국땅 알마타에도 1만2천명이나 살고 있다니 놀랍고 이곳에서 만난 한 사람의 고려인이라 불리우는 우리 동포 때문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걸 느끼게 됐다.

알마타 공항을 나오자 우리를 맞이 하는 아시아투어 직원들이 나와 있었다. 한국어를 통역할 사람이 없어 같은 비행기를 타고온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아 아시아투어의 직원들의 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는데 이 도시는 한국차가 절반이다. 수많은 한국차가 굴러다니는데 으쓱 하지 않을 수가 없고 삼성과 엘지의 간판도 보이는 통에 묘한 안도감 마져 들었다.

이렇게 해서 알마타의 첫나을 맞이 하게 되었는데 햇살은 뜨겁지만 건조해서 끈적이지 않은 날씨와 눈이 따라 다닐정도로 멋진 아가씨들의 행진이 넘처 나는 호텔 앞의 거리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는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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