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 브리스토우 [Lily Bristow]

2002.12.18 14:59

시샤 조회 수:1798 추천:1

릴리 브리스토우(Lily Bristow)

릴리 브리스토우 여사는 가장 정신력이 강한 여성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오랜 세월 동안 여성들이 교회에서 사교계의 여성으로 자리를 잡는 사이 그녀는 천막 속에서 남성들과 어울리면서 막영 생활을 하기도 한 여성이다. 중류 사회 억세터 가문의 여성으로서 분명히 스캔들을 일으키기 중분한 조건이었는데도 그런 일은 전혀 일지 않았다.

여염집 여성으로 충실한 주부가 되도록 빅토리아풍의 가정 분위기에서 성장한 릴리는, 주부들 모임에 참석하여 교구의 목사와 차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으나 수 년 사이에 몇몇 혜성과 같이 나타난 유명 산악인처럼 부각되었던 것이다. 본디, 페트릭스 가문과 친교를 맺고 있던 브리스토우 가문을 배경으로 릴리는, 1883년 알프렛 머메리와 결혼한 에리 페트릭스와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이 무렵 아담한 억세터 가문을 자극하여 그들이 차지할 수 있는 몇 가지의 자기 만족거리를 들춰낸 사람이 바로 머메리였을 것이라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어 메리와 그녀의 오빠, 그리고 릴리가 그 영향을 받아 클라이밍에 열중하게 된 것이다.

이 시절 머메리의 활약이나 릴리가 클라이밍을 언제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그의 처와 친구들과 함께 알프스에서 시간을 보냈으리라고 추정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1892년 릴리는 샤모니에서 대단위 등산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 가장 두드러진 기록으로 볼 수 있는데, 당시 그녀는 그랑샤르모 암릉 등반에 가담한 것이다.

좁다란 암릉에 다섯 명의 사내와 여성 둘이 기어올라 붙어있는 모습은 과연 유별난 윈족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을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경험 많은 클라이머에게도 만만치 않게 알려져 있던 샤르모였기 때문에 더욱 놀랍기만 한 것이다. 릴리와 등반했던 여성 클라이머는 미스 파스퇴르였는데, 괄목할만한 업적으로 간주되는 등반이었다.
서서히 신명이 나기 시작한 그녀는 1893년 다시 머메리와 합류하여 그의 친구들, 말하자면 슬링스비, 콜리, 하스팅즈와 로프를 함께 맬 수 있었다. 당대 알프스 최고의 클라이머들이었던 일행 가운데 그녀는 자유롭게 등반할 수 있었으나 르껭 초등이나 플랑 서벽 초등에는 섭섭하게도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 썩 좋지 못한 조건에서 머메리와 진종일 난도 높은 등반을 하면서 그녀는 무거운 판 사진기를 휴대한 채 기록을 담아가며 지고의 등반을 해낸 것이다. 이 기록을 통해 그녀는 머메리와 난도 높은 등반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충분히 알리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며, 이로써 여성들에게도 암벽 등반을 즐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환상적인 등반에 자극을 받은 릴리는 집에 돌아와"그 등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매 피치를 오를 때마다 각기 다른 등반 가치를 지니고 있기도 했습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기록을 보면 늦게 하산을 시작한 일행은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낭띠용 빙하에서 길을 잃고 두 명밖에 들어갈 수 없는 천막에 무려 6명이 들어가 빽빽이 쭈그린 채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는데, 이 때 머메리는 그녀에게 외투를 빌려주어 몸이 마른 상태로 있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나이들 틈새에서 그녀만이 드러누울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레퐁 횡단에 만족할 수 없었던 릴리 브리스토우는 쁘띠 드류에 시선을 맞추었고 그 등반에서는 몇 차례 선등할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그 등반은 정말 즐거운 것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릴리의 드류 등반은 숙달된 전문 클라이머들에게 있어서도 그레퐁 다음의 지정곡과 같은 것이었다.
이 등반 후 소위 하이 레벨의 루트를 찾아 쩨르마트로 건너간 슬링스비 일행을 멀리한 머메리와 릴리 일행은 치날로 들어가 치날로트호른을 등반할 계획을 세웠다. 워낙 어프로치가 길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걷기 싫어하던 머메리는 계속 돌아 내려가자고 했지만 릴리는 비록 정상에 오를 때까지 그와 말다툼을 하는 한이 있어도 이미 치날로트호른 등반을 작정하고 있었다.

치날로트호른 등반을 끝내고 쩨르마트로 내려왔을 때 사람들은 브리스토우 여사가 치날로트호른을 올랐다는 사실을 모두 부정하면서도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혹시 커다란 산록에 있는 자그마한 산을 올랐겠거니 하며 반신반의했다. 비교적 좋은 날만 택해 산을 올랐던 릴리의 경우 그녀의 유별난 친구들과 동행하며 마터호른 이탈리아 쯔무트릉 등정 후, 하산 도중 혹독한 폭풍에 갇혔었다. 가벼운 차림의 등반팀에게 이 폭풍이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의 과제를 던져 주리라고 생각했을까? 완전히 정신나간 상태로 산장에 도착한 릴리였지만 그 정도의 경험으로 그녀의 열정을 가라앉히지는
못했다.

이후 머메리의 처 메리 머메리는 브리스토우 여사가 머메리에게 매료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머메리의 처는 릴리가 그로부터 멀리 하도록 그녀를 낙심시키도록 하였는지 몰라도 릴리는 1897년 머메리와 클라이밍을 하지 않은 대신 가이드 츠브링겐과 폴링 거를 대동하고 쯔뭇트릉 최초의 하강에 성공했다. 그 암릉의 네 번째 등반을 한 후의 기록을 세운 것인데, 바로 그날 그 길로 다른 두 명의 여성이 우연히 등반하기도 하였다.

그 후 그녀는 클라이밍을 중단했지만 드류나 그레퐁을 선등했던 최초의 여성 클라이머로서 위대한 가이드레스 클라이밍을 주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머메리가 낭가파르밧에서 실종되면서 릴리 브리스토우의 클라이밍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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